미야자키 쓰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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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4명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한 연쇄 살인범이다. 그는 1962년 도쿄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신체적 장애와 부모와의 불화, 할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인해 고립된 삶을 살았다. 1989년 체포 당시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정신 분열증 등 다양한 진단을 받았다. 1997년 사형이 선고되었고, 상고가 기각되어 200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범행은 오타쿠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사형 제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가족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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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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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야자키 쓰토무 |
출생 | 1962년 8월 21일 |
출생지 | 이쓰카이치, 도쿄도, 일본 |
사망 | 2008년 6월 17일 () |
사망 장소 | 도쿄 구치소, 도쿄도, 일본 |
사망 원인 | 교수형 |
별칭 | 오타쿠 살인마 쥐 인간 |
국적 | 일본 |
거주지 | 체포 당시 주거지: 일본,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쓰카이치초 오와다 181번지 () |
범죄 정보 | |
범죄 기간 | 1988년 - 1989년 |
범행 장소 | 사이타마현 및 도쿄도 |
피해자 수 | 4명 |
유죄 판결 | 가중 살인 (4건) |
형량 | 사형 |
체포 일자 | 1989년 7월 23일 |
범죄 상태 | 사형 집행 |
법적 정보 | |
죄목 | 살인죄 사체 유기・사체 손괴죄 미성년자 약취죄 강제추행죄 |
2. 사건 발생 이전
미야자키 쓰토무는 1962년 8월 21일 이쓰카이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요골 융합증이라는 희귀한 선천성 기형을 앓고 있었다.[7] 그의 가족은 지역 신문사를 운영했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마을 의회에서 활동했던 지역 유지였다. 부모님이 바빴기 때문에 그는 주로 할아버지와 가족이 고용한 지적 장애인 보모의 손에서 자랐다.
미야자키는 초등학교 시절 기형 때문에 따돌림을 당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메이지 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메이지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반에서 56명 중 40등을 기록하여 메이지 대학 입학 자격을 얻지 못하고, 영어 교사 대신 사진 기술자가 되기 위해 지역 전문대학에 진학했다.[7]
1980년대 중반, 미야자키는 이쓰카이치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다. 가족은 이쓰카이치에서 영향력이 컸지만, 그는 가업을 물려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체포 후, 미야자키는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했던 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들어주는 것"이었지만, 물질적인 것에 더 신경 쓰는 부모님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무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8] 그는 이 시기에 자살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할아버지에게서만 지지를 받았다고 느꼈다.
1988년 5월 16일 할아버지의 사망으로 미야자키의 주요 우울 장애는 심화되었고, 더욱 고립되었다.[8]
2. 1. 출생과 성장 배경
미야자키 쓰토무는 1962년 8월 21일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쓰카이치정(현 아키루노시)에서 지역 신문사를 운영하는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3] 증조부는 촌의원, 할아버지는 정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36] 미야자키는 '양측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이라는 희귀한 신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38], 이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따돌림을 당했다.[40]미야자키의 부모는 맞벌이로 바빠[34], 주로 지적 장애가 있는 남자 보모[34]와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35] 권위적인 아버지와 불화하고,[7] 어머니는 미야자키에게 애정을 쏟지 않아[40] 미야자키는 고립감을 느꼈다.
2. 2. 학창 시절
미야자키 쓰토무는 1978년 메이지 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메이지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고등학교 시절 괴수 영화, 프로레슬링, 테니스, 장기, 아이돌, 애니메이션, 호러, 로리콘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7] 1981년 도쿄공예대학 화상기술학과에 진학했으며, 1982년 NHK 방송 토크쇼 "YOU"에 출연하기도 했다.[7]그는 요골 융합증이라는 선천성 기형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을 당했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메이다이 나카노 고등학교에서는 우등생이었으나, 성적이 급격히 하락하여 반에서 56명 중 40등을 기록, 메이지 대학 입학 자격을 얻지 못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려 했으나, 사진 기술자가 되기 위해 지역 전문대학에 진학했다.[7]
초등학교 시절에는 "괴수 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괴수에 열중했지만, 반에서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41] 산수에는 뛰어났지만, 국어와 사회는 어려워했다.[42] 중학교 시절에는 1, 2학년 때 육상부에, 3학년 때는 장기부에 소속되었다. 통신 교육으로 가라테를 배우고, 동급생들에게 가라테 형을 보여주기도 했다.[43]
2. 3. 대학 졸업 후
1983년 3월 대학 졸업 후 삼촌의 소개로 도쿄도 고다이라시의 인쇄 회사에 취직하여 인쇄기 오퍼레이터로 근무하였다.[46] 그러나 근무 태도가 좋지 않아 1986년 3월, 개인 사정을 이유로 퇴사하였다. 이후 실직 상태에서 부모로부터 가업을 도울 것을 여러 번 권고받았으나,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수개월간 생활하였다.잠시 아버지의 가업인 신문사를 돕다가, 그 해 말 만화 회사에 취직하여 애니메이션 동인지 발행에 참여했지만, 동료들에게 미움을 사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후 애니메이션 클럽이나 비디오 동호회 등에 가입하여 전국 각지의 회원들과 교류하며, 녹화된 TV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그 밖의 만화책, 특수 촬영 프로그램으로 촬영된 비디오를 수집하였다. 훗날 경찰이 그의 방을 검사했을 때 다량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쏟아져 나왔으며, 체포 후 가택 수색 결과 6,000개 가까운 비디오 테이프와 만화책 등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988년 5월 16일 할아버지의 사망으로 미야자키의 주요 우울 장애는 심화되었고, 더욱 고립되었다.[8]
3. 사건의 경과
1988년 8월부터 1989년 6월까지, 미야자키 쓰토무는 사이타마현에서 4세에서 7세 사이의 여자아이 4명을 연쇄적으로 납치하여 살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아동 대상 범죄가 드물었던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야자키는 1988년 8월 22일, 4세의 곤노 마리를 납치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3일에는 7세의 요시자와 마사미, 12월 12일에는 4세의 난바 에리카를, 그리고 1989년 6월 6일에는 5세의 노모토 아야코를 납치하여 살해했다.
미야자키는 피해자들을 살해한 후 시신을 유린하고, 일부 피해자의 경우 시신의 일부를 훼손하거나 섭취하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또한 피해자 가족에게 범행을 조롱하는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10][11][12]
3. 1. 연쇄 살인
1988년 8월부터 1989년 6월까지 미야자키 쓰토무는 4세에서 7세 사이의 여자아이 4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성적으로 유린했다. 그는 피해자 중 한 명의 피를 마시고 손의 일부를 먹었다.[9] 이 범죄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범죄가 드물었던 사이타마현에 큰 충격을 주었다.1988년 8월 22일, 미야자키는 4세의 곤노 마리를 자신의 검은색 닛산 랭글리로 유인하여 납치한 후, 도쿄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지역에서 살해하고 시신을 유린했다. 그는 시신을 집 근처 언덕에 유기하고 옷을 가져갔으며, 시신이 부패한 후 다시 돌아와 손과 발을 절단하여 옷장에 보관했다. 미야자키는 곤노의 남은 뼈를 태워 가루로 만들고, 치아, 옷 사진, 真理さん、骨、火葬、調査して、証明して|마리. 뼈. 화장. 조사. 증명.일본어라는 내용의 엽서와 함께 상자에 넣어 가족에게 보냈다.[10]
1988년 10월 3일, 미야자키는 7세의 요시자와 마사미를 납치하여 차에 태워 곤노를 살해했던 장소로 데려갔다. 그는 요시자와를 살해하고 시신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떠날 때 그녀의 옷을 가져갔다.[11]
1988년 12월 12일, 미야자키는 4세의 난바 에리카를 납치하여 나가우리의 주차장으로 데려가 사진을 찍은 후 살해했다. 그는 난바의 시신을 차 트렁크에 넣고, 옷을 버린 후 시신을 인접 주차장에 유기했다. 3일 후 시신은 발견되었다. 12월 20일, 난바의 가족은 미야자키가 보낸 絵梨香、かぜ、せき、のど、楽、死|에리카. 감기. 기침. 목. 휴식. 죽음.일본어이라는 내용의 엽서를 받았다.[11]
1989년 6월 6일, 미야자키는 5세의 노모토 아야코를 유인하여 살해하고 시신을 시트로 덮어 트렁크에 넣었다. 그는 시신을 아파트로 가져가 이틀 동안 시신과 성관계를 갖고,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11] 시신이 부패하자 미야자키는 시신을 절단하여 일부는 묘지에, 머리는 근처 언덕에 버렸다. 그는 노모토의 손을 보관하며, 손에서 피를 마시고 인육했다. 경찰이 시신 일부를 발견할 것을 두려워한 미야자키는 2주 후 묘지와 언덕으로 돌아가 유해를 아파트로 가져와 옷장에 숨겼다.[12]
3. 2. 체포 및 재판
1989년 7월 23일, 미야자키는 하치오지의 한 공원에서 놀던 두 자매 중 언니와 떨어진 여동생을 유인해 옷을 벗도록 하고 사진을 찍다가,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공격당했지만 도주했다.[13][11] 결국 자신의 차를 찾기 위해 공원으로 돌아왔다가, 아버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의 방갈로를 수색한 결과,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일부에는 애니메이션과 슬래셔 영화가 섞여 있었고, 그 사이에는 피해자들의 비디오 영상과 사진이 있었다.[14]미야자키 쓰토무의 재판은 1990년 3월 30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쥐 인간"이라는 또 다른 자아의 탓으로 돌리며 횡설수설했고, 재판 중에는 "쥐 인간"을 만화 형태로 그렸다.[19]
7년간 진행된 재판은 미야자키의 정신 상태에 초점을 맞췄다. 일본 법에 따르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으며, 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은 감형받을 수 있다. 법원이 임명한 세 팀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미야자키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한 팀은 인지 장애, 다른 팀은 정신 분열증이나 해리성 정체감 장애 ("다중 인격 장애"), 세 번째 팀은 성격 장애는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20]
도쿄 지방 법원은 미야자키가 범죄의 규모와 결과를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 1997년 4월 14일에 사형을 선고했다.[20]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 법원과 2006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21]
미야자키는 자신의 연쇄 살인을 "자비로운 행위"라고 묘사했다.[22][23] 아동 살인자 고바야시 가오루는 자신을 "다음 미야자키 쓰토무 또는 다쿠마 마모루"라고 칭했고,[24] 미야자키는 "그가 정신 감정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을 '두 번째 미야자키 쓰토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25]
1992년 4월, 미야자키는 약 140권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잡지를 소지하고 있었고, 공판에서 감정서가 낭독되는 동안 메모 용지에 괴수 그림을 그렸다.[56] 철학, 법학, 정신 의학, 살인 사건, 만화, 게임 등 다양한 장르의 서적을 구입하거나 제공받았다.[57] 독방에 소송 서류와 서적을 약 50cm 정도 쌓아두기도 했다.[58] 공판에서는 부모를 "아버지의 사람", "어머니의 사람"이라고 불렀고, 아버지의 자살에 대해서는 "벌을 받았다"고 말했다.[58] 2주에 한 번 면회를 오는 어머니로부터 『드래곤볼』 등의 만화책을 받았지만, 사건에 대한 언급이나 가족의 근황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58]
항소 중인 1998년, 미야자키는 서간 인터뷰집 『꿈속에서』를 출판하며 "더 유명해지고 싶다", "유명해지는 것은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재판장에게는 "법정은 화려한 무대"라고 답했다.[59] 또한,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61] TV 아사히 기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개하는 것을 승낙했지만, 변호인은 불이익을 우려해 방영 중지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0] 2000년 10월,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성년 후견 제도에 따른 후견인 선임을 도쿄 가정 법원에 신청하며, 미야자키가 불이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61]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상은 2008년 6월 17일에 미야자키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고, 그는 같은 날 도쿄 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26][27]
3. 3. 사형 집행
2008년 6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 대신은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고, 같은 날 도쿄 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향년 45세).[26][27][32][67][68] 같은 날 도쿄 구치소에서는 SM 클럽 하극상 살인 사건의 사형 확정자인 리쿠타 마사시(당시 37세)의 형도 집행되었으며, 오사카 구치소에서도 사형 확정자 1명의 형이 집행되었다.[32]사형 확정에서 집행까지의 기간은 2년 4개월로, 당시 과거 10년의 집행까지의 평균 기간(약 8년)보다 매우 짧았다.[67]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된 다른 사형수들의 집행 기간도 이전 평균보다 짧았다.[32]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2008년에 사형이 집행된 15명의 사형 확정에서 집행까지의 평균 기간은 과거 10년의 약 절반인 4년 1개월이었다.[69]
미야자키는 차분하게 집행을 받아들였으며, 어머니는 유해와 대면 후 처리를 구치소에 맡겼다고 한다. 미야자키의 유골은 조시가야 영원 내에 있는 법무성의 납골당에 납골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형 집행은 법무성 형사국 검사가 심신 상실 등 집행 정지 사유를 조사한 후, 교정국 등의 결재를 거쳐 법무대신이 최종적으로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는 절차로 진행된다. 하토야마 구니오는 법무대신 퇴임 후인 2010년 12월, TBS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미야자키의 사형 집행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71][72]
같은 해 6월 8일에 발생한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 사건 발생 9일 후에 집행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미야자키의 사형 집행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73][74], 저널리스트 우에스기 타카시는 하토야마가 같은 해 3월에 이미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키하바라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제앰네스티 일본과 사형 폐지를 추진하는 의원 연맹 등 인권 단체는 사형 집행에 대해 항의를 표명했다.[75][76] 일본 변호사 연합회는 사형 제도의 존폐를 포함한 근본적인 검토와 재검토가 이루어질 때까지 일정 기간 집행을 중지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77] 미야자키의 국선 변호인은 재심 청구 준비 중이었음을 밝히며 사형 집행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78]
4. 범행의 특징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8년 8월부터 1989년 6월까지 4세에서 7세 사이의 여자아이 4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했으며, 시체를 성적으로 유린했다.[9] 피해자 중 한 명의 피를 마시고 손의 일부를 먹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9]
범행 후 피해자 가족에게 엽기적인 내용의 엽서를 보내 범행을 과시하기도 했다. 콘노 마리의 가족에게는 마리의 뼈를 태운 가루, 치아, 옷 사진과 함께 "마리. 뼈. 화장. 조사. 증명."이라는 내용의 엽서를 보냈다.[10] 난바 에리카의 가족에게는 잡지에서 오린 단어로 "에리카. 감기. 기침. 목. 휴식.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조립하여 보냈다.[11]
이 사건은 아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드물었던 사이타마현에 큰 충격을 주었다.[9]
5. 정신 감정 논란
미야자키 쓰토무의 재판은 1990년 3월 30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행동을 '쥐 인간'이라는 가공의 존재 탓으로 돌렸고, '쥐 인간'을 만화 형태로 그리기도 했다.[19]
7년간 진행된 재판에서는 미야자키의 범행 당시 정신 상태가 주요 쟁점이었다. 일본 법률에 따르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으며, 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은 감형받을 수 있다. 법원이 임명한 세 팀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미야자키의 정신 상태에 대해 서로 다른 진단을 내렸다. 한 팀은 미야자키에게 인지 장애가 있다고 판단했고, 다른 팀은 정신 분열증이나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 번째 팀은 미야자키가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20]
도쿄 지방 법원은 미야자키가 범행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하여 1997년 4월 14일 사형을 선고했다.[20] 이 판결은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 법원과 2006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모두 유지되었다.[21]
미야자키는 자신의 범행을 "자비로운 행위"라고 표현했다.[22][23] 아동 살인범 고바야시 가오루는 자신을 "다음 미야자키 쓰토무 또는 다쿠마 마모루"라고 칭했는데,[24] 미야자키는 이에 대해 "그가 정신 감정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을 '두 번째 미야자키 쓰토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25]
1992년 4월, 첫 번째 정신 감정 결과가 발표될 당시 미야자키는 약 140권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잡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같은 달 공판에서 감정서가 낭독되는 동안 괴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56] 그는 철학, 법학, 정신 의학, 살인 사건, 만화, 게임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구입하거나 제공받았다.[57] 1993년 5월, 그는 독방에 소송 서류와 책들을 약 50cm 높이로 쌓아두었다.[58] 공판에서 그는 부모를 "아버지의 사람", "어머니의 사람"이라고 불렀고,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감상을 묻는 변호인의 질문에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58] 그는 2주에 한 번씩 면회 오는 어머니로부터 『드래곤볼』 등의 만화책을 받았지만, 어머니가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가족의 근황을 이야기해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58]
미야자키는 1998년 항소 중 창출판에서 서간 인터뷰집 『꿈속에서』를 출판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더 유명해지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유명해지는 것은 기분이 좋다. 미디어에서 자신의 사건이 평론되면, '지금도 떠받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법정을 "화려한 무대"라고 표현했다.[59] 그는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편지가 오는 것은) 제가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지지받거나, 공감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61]
2000년 10월 25일,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미야자키가 자신의 불이익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언론에 자필 편지를 공개하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성년 후견 제도에 따른 후견인 선임을 도쿄 가정 법원에 신청했다. 그녀는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불이익인지 이해하는 능력을 전혀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61]
6. 사회적 영향
일본 언론은 미야자키를 오타쿠 문화와 관련하여 "오타쿠 살인자"라고 칭했다.[15] 그의 살인은 오타쿠에 대한 도덕적 공황을 일으켰으며, 애니메이션과 공포 영화가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여러 신문들은 미야자키가 방치된 성장 환경 때문에 만화의 환상적인 세계로 숨어들었다고 주장했다.[16]
도쿄 국제 대학의 정신분석학자 오코노기 케이고는 『주간 포스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신과 부모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2자 또는 3자 관계조차 경험하지 못하고 비디오와 만화의 환상적인 세계에서 현실로 넘어가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위험은 이제 극에 달했습니다.[16]
이러한 보도에 이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오쓰카 에이지는 미야자키의 범죄에 관한 저서에서, 미야자키의 포르노 컬렉션은 그의 변태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진 작가에 의해 추가되거나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7] 또 다른 평론가인 이치하시 후미야는, 경찰이 오타쿠에 대한 대중의 고정 관념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유죄 판결을 굳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개된 정보가 이를 부추겼을 것이라고 의심했다.[18] 섀런 킨셀라는 당시 도쿄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의 방에는 대규모의 만화 및 비디오 컬렉션이 전형적이었다고 주장한다.[16]
6. 1. 오타쿠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
미야자키 쓰토무가 검거되자 그의 집에서 5763편의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공포 영화와 아동이 등장하는 성인 영상물도 있었다. 일본 언론은 이를 오타쿠를 잠재적 범죄자인 것처럼 보도하여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15]원래 오타쿠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하위 문화였으나, 이 사건 보도를 통해 1990년대에 오타쿠 문화가 부정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언론은 미야자키를 오타쿠 문화와 관련하여 "오타쿠 살인자"라고 칭했다.[15] 그의 살인은 오타쿠에 대한 도덕적 공황을 일으켰으며, 애니메이션과 공포 영화가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여러 신문들은 미야자키가 방치된 성장 환경 때문에 만화의 환상적인 세계로 숨어들었다고 주장했다.[16]
미야자키의 방은 창문과 벽이 비디오테이프로 뒤덮여 있었고, 그 비디오테이프는 약 6000개에 달했다. 책장에는 『리본의 기사』, 『게게게의 키타로』 등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꽂혀 있었다. 바닥에는 소녀 잡지 등이 흩어져 있었고, 폭력적, 성적, 엽기적인 내용의 만화와 비디오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유치원 입학 안내 팸플릿이나 여성이 찍힌 테니스 클럽 팸플릿 등이 발견되면서, 오타쿠・로리콘・호러 마니아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것들의 악영향을 주장하는 의견이 쏟아져 나와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산되었다.
도쿄 국제 대학의 정신분석학자 오코노기 케이고는 『주간 포스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신과 부모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2자 또는 3자 관계조차 경험하지 못하고 비디오와 만화의 환상적인 세계에서 현실로 넘어가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위험은 이제 극에 달했습니다.[16]
이러한 보도에 이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오쓰카 에이지는 미야자키의 범죄에 관한 저서에서, 미야자키의 포르노 컬렉션은 그의 변태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진 작가에 의해 추가되거나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7] 또 다른 평론가인 이치하시 후미야는, 경찰이 오타쿠에 대한 대중의 고정 관념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유죄 판결을 굳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개된 정보가 이를 부추겼을 것이라고 의심했다.[18] 섀런 킨셀라는 당시 도쿄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의 방에는 대규모의 만화 및 비디오 컬렉션이 전형적이었다고 주장한다.[16]
6. 2. 사형 제도 논쟁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형 집행은 일본 내 사형 제도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특히, 2008년 하토야마 구니오 법무상이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고, 미야자키가 도쿄 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사형 집행 과정의 투명성과 관련된 논의를 촉발시켰다.[26][27]미야자키는 월간지 '창' 편집장 시노다 히로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의 현행 사형 방식인 교수형을 비판하며, 약물 주사에 의한 사형 도입을 주장했다.[62] 그는 "발판이 빠져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공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며, 현행 방식에서는 사형수가 죽음의 공포와 싸우느라 반성이나 사죄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62]
6. 3. 가족에게 미친 영향
미야자키 쓰토무의 범죄는 가족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회적 낙인과 비난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파괴했다.[83]미야자키가 체포된 후, 그의 가족들은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81] 두 여동생에게는 "너희도 죽어라"와 같은 협박 편지가 쇄도했다.[83] 이로 인해 큰딸은 회사를 그만두고 약혼을 파기했으며, 둘째 딸은 간호학교를 자퇴해야 했다.[83] 미야자키의 부모는 이혼 후 어머니의 성으로 재혼했다.[84][85]
아버지의 형제들과 어머니의 형제들까지 직장을 잃는 등 친척들 역시 사회적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86][87]
구분 | 내용 |
---|---|
큰 여동생 | 회사 퇴사, 약혼 파기 |
작은 여동생 | 간호학교 자퇴 |
아버지의 남동생 (2명) | 퇴직, (장남) 회사 명의 변경 및 임원 사임, (차남) 이혼 및 딸 양육권 포기 |
어머니의 형의 두 아들 | 경찰관, 고등학교 교사 직업 사임 |
미야자키의 아버지는 사건 발생 4년 후인 1994년, 오메시의 다마가와에서 투신자살했다.[89] 그는 아들의 죄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친족들까지 비난받는 현실에 고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91] 작가 사키 류조는 아버지의 자살을 "현실 도피"라고 비난했다.[89]
7. 미야자키 쓰토무를 연기한 배우
- 이수완 - 실화극장 죄와 벌 65, 66회 방송분 '꿈속의 살인' 편 (토모야라는 가명을 사용)
- 히라야마 히사노 ('미야지마 쓰토무' 명의) - 1999년 11월 20일에 공개된 영화 지옥 (이시이 테루오 감독)의 등장인물로, 미야자키가 모델이 되었다.
- 톤텐 산난보 - 2014년 12월 13일 토요 프리미엄 시간대에 방송된 '보도 스쿠프 SP 격동! 세기의 대사건 II' (후지 TV)
- 사카모토 신 - 2017년 10월 7일 토요 프리미엄 시간대에 방송된 '충격 스쿠프 SP 30년째의 진실 ~도쿄·사이타마 연속 여아 유괴 살인범·미야자키 쓰토무의 육성~'에서 미야자키를 연기했다.
- 나가사카 잇테츠 (극단 펠리칸) - 2018년 12월 28일에 방송된 '헤이세이 일본의 순간 영상 30' (니혼 TV)의 재현 드라마에서 미야자키를 연기했다. 이 재현 드라마의 영상은, 2023년 3월 28일 방송된 더! 세계 엉뚱 뉴스에서도 사용되었다.
8. 저서
- 夢のなか、連続幼女殺害事件被告の告白일본어 (창출판, 1998년 12월)
- 夢のなか、今も 連続幼女殺害事件元被告の告白일본어 (창출판, 2006년 2월)
『創』일본어 편집부와의 왕복 서간을 게재한 것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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